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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강산 탐방

인천점집 한양굿 전통무속 백청암 [낙산사 방문기]

by 인천점집 백청암 2025. 3. 26.
낙산사 (절,사찰)
주소: (도로명) 주소강원특별자치도 양양군 강현면 낙산사로 100
       (지번주소) 강현면 전진리 57-1
전화 033-672-2447, 방문시간 06:00~17:30 기타 연중무휴/야간입장불가/반려동물금지(개모차금지)
  • 승용차주차비(1일) 5,000
  • 버스주차비(1일) 8,000
  • 입장료무료
안내 정보주차 가능, 예약 불가, 와이파이 불가, 휠체어접근 가능, 반려동물동반 불가
 
낙산사는 강원특별자치도 양양군 강현면 오봉산(五峰山)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승려 의상이 창건한 사찰이다. 오봉산은 낙산이라고도 한다.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 본사인 신흥사(新興寺)의 말사이다. 해변에 위치한 특이한 구조를 갖춘 사찰로, 우리나라 3대 관음기도도량 중의 하나이다. 낙산은 범어 보타락가(補陀落伽, Potalaka)의 준말로서 관세음보살이 항상 머무르는 곳이라는 의미이다. 671년(문무왕 11) 의상(義湘)이 창건하였다. 시도유형문화재이다.

오봉산은 낙산이라고도 한다.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 본사인 신흥사(新興寺)의 말사이다. 해변에 위치한 특이한 구조를 갖춘 사찰로, 우리나라 3대 관음기도도량 중의 하나이다. 낙산은 범어 보타락가(補陀落伽, Potalaka)의 준말로서 관세음보살이 항상 머무르는 곳이라는 의미이다. 671년(문무왕 11) 의상(義湘)이 창건하였다.

의상은 당나라에서 귀국하자 관세음보살의 진신(眞身)이 낙산 동쪽 바닷가 굴 속에 있다는 말을 듣고 친견하기 위해서 찾아갔다. 굴 입구에서 7일 동안 재계하고 좌구(座具)를 새벽물 위에 띄우자 용중(龍衆)과 천중(天衆) 등 8부 신장이 굴속으로 그를 인도하였다. 공중을 향하여 예배드려 수정 염주 한 꾸러미를 받아서 나오는데, 동해의 용이 여의보주(如意寶珠) 한 알을 다시 바쳤다. 의상은 이들을 가지고 와서 다시 7일 동안 재계하여 관세음보살의 진신을 보았다. 관세음보살이 이르기를 “좌상(座上)의 산꼭대기에 한 쌍의 대나무가 솟아날 것이니, 그 땅에 불전을 짓는 것이 마땅하리라.” 하였다. 의상은 그곳에 금당(金堂)을 짓고 관음상을 만들어 모신 뒤 절 이름을 낙산사라 하고, 그가 받은 두 구슬을 성전(聖殿)에 모셨다.

창건 이후 원효(元曉)도 관세음보살을 친견하기 위하여 이 절을 찾았는데, 원효가 절에 이르기 전에 관세음보살의 화신을 만나게 되었지만 알아보지 못하였고, 낙산사에 가서도 풍랑이 심해 관세음보살이 상주하는 굴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다는 설화가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다. 이 낙산사의 관음상에는 승려 조신(調信)이 꿈을 꾸고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게 되었다는 설화가 있다. 한 여인을 사랑하게 된 승려가 사랑이 맺어지기를 관음상 앞에서 염원하였는데, 해로하기 50여 년 만에 결국 고통을 안고 헤어지게 된다는 내용이다. 이광수(李光洙)는 이것을 「꿈」이라는 소설로 발표하였다.

858년(헌안왕 2)에는 사굴산파의 개산조 범일(梵日)이 이곳에서 정취보살(正趣菩薩)을 친견한 뒤 낙산 위에 3칸의 건물을 지어 불상을 봉안하였다. 이 절은 고려 초기에 산불로 소실되었으나 관음보살과 정취보살을 모신 불전만은 화재를 면하였다. 고려 태조는 고려를 세운 직후 봄 · 가을로 낙산사에 사자를 보내어 재를 올렸을 뿐 아니라, 이것을 갑령(甲令)으로 삼았다. 그리고 속인들은 이 낙산의 굴 앞에서 예배하면 청조(靑鳥)가 나타난다고 믿었는데, 1185년(명종 15) 당시의 병마사였던 유자량(庾資諒)이 굴 앞에서 예배하자 파랑새가 꽃을 물고 날아와 갓 위에 떨어뜨린 일이 있었다고 한다. 유자량이 청조의 영험을 보고 지은 시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어 있다.

몽고의 침략으로 이 절이 전소될 때 두 성상(聖像)을 모신 건물도 불타 버렸고, 여의주와 수정 염주는 이 절의 노비가 땅에 묻고 도망쳤다가 난이 평정된 뒤 파내어 명주 감창사(監倉使)에게 바쳤다. 감창사 이녹수(李祿綏)는 1258년(고종 45)에 각유(覺猷)에게 어부(御府)에 모시도록 하였다. 그러나 관음상은 이때 화를 당하여 형체만 남았고, 복장(腹藏) 속의 보물은 몽고병에게 약탈당하였다. 이규보(李奎報) 등이 이 소식을 듣고 다시 관음상을 봉안할 때 심원경(心圓鏡) 2개, 오향(五香) · 오약(五藥) · 색실 · 비단주머니 등을 관음상의 복중에 넣고 겉모습도 복구하였다.

조선시대에도 낙산사는 관음신앙의 본산으로 그 명성을 이어갔다. 『태조실록』에는 조선 태조 이성계의 증조부로 익조(翼祖)로 추존된 이행리(李行里)가 낙산사 관음굴에서 아들 갖기를 기도하여 도조(度祖) 이춘(李椿)을 낳았는데 이춘은 조선 개창의 예언을 직접 받은 인물로 기록되고 있다. 1468년(세조 14) 세조는 학열(學悅)을 중창주로 삼아 낙산사를 크게 중창하고 아들(훗날 예종)의 원찰로 삼았다. 1470년(성종 1) 성종은 낙산사의 잡요와 염분세(鹽盆稅)를 면제해 주고 노비 20구를 하사하였다.

1471년(성종 2) 선학(仙學)이 용선전(龍船殿) · 영산전(靈山殿) · 어제루(御製樓) · 승당(僧堂) 등을 보수하고 단청하였다. 4년 뒤 불탔으나 선학이 복구하였으며, 임진왜란 때 관음전과 관음상 · 정취전 · 금불상이 모두 소실되었다. 1631년(인조 9) 종밀(宗密)이 중창하였고, 1643년 도원(道源)이 중건하였으며, 1905년 경은(敬隱)이 선당(禪堂)과 후각(後閣) 등을 복구하였다. 그러나 한국전쟁 때 전소된 것을 1953년 4월, 당시 1군단장이었던 이형근(李亨根)이 원통보전 · 범종각(梵鍾閣) 등을 복구하였으며, 1976년 원철(圓徹)이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원통보전 · 종각 · 일주문 · 천왕문 · 선실 · 승당 · 객실 등이 있다. 문화재로는 보물 제499호인 양양 낙산사 칠층석탑,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3호인 양양 낙산사 홍예문,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4호인 낙산사 원장(洛山寺垣墻), 보물 제1723호 양양 낙산사 해수관음 공중사리탑 · 비 및 사리장엄구 일괄,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36호인 낙산사 홍련암(洛山寺紅蓮庵) 등이 있다.

이 중 칠층석탑은 창건 당시 3층이었던 것을 1468년의 중창 때 7층으로 개축했다고 전한다. 홍예문은 반월형의 문루(門樓)인데, 낙산사 입구에 세워져 있다. 화강석 26개를 장방형으로 다듬어서 반월형의 문을 만들었는데, 이 26이라는 숫자는 당시 강원지부(江原之部)의 고을 숫자를 의미한다고 한다. 당시 강원도에는 26개의 고을이 있었는데, 세조의 뜻에 따라 각 고을의 군수가 석재를 하나씩 모아서 세웠다는 속전이 있다.

원통보전의 담장은 적토(赤土)로 빚은 기와와 화강석을 배열한 것으로 전체 높이 4m, 둘레는 30여m에 이르고 있다. 근년에는 화강암으로 다듬은 동양 최대의 해수관음입상(海水觀音立像)을 조각하였는데, 석재는 전라북도 익산의 호남 채석장에서 반입한 것으로 750톤이 사용되었다. 조각가 권정환에 의해 1972년 5월 착수되어 5년 만인 1977년 11월 6일 점안(點眼)되었다. 높이 16m, 둘레 3.3m, 좌대 넓이 6㎡이며, 좌대의 앞부분은 쌍룡상(雙龍像), 양 옆으로는 사천왕상이 조각되어 있고, 그 위 한 송이 연꽃으로 된 연봉(蓮峰) 위에 관음보살상을 안치하였다. 관음상은 왼손에 감로수 병을 받쳐 들고, 오른손은 천의(天衣) 자락을 살짝 잡고 있으며, 미간에는 백호(白毫)를 박아 온누리에 퍼지는 자비의 광명을 상징하고 있다. 크기와 원만한 상호(相好), 균형 잡힌 체감미 등이 근래에 보기 드문 수작이다.

이 밖에도 이 절 옆에는 의상이 홍련 위에 나타난 관음을 친견하고 대나무가 솟은 곳에 불전을 지었다고 전하는 자리에 세운 홍련암이 있으며, 의상이 좌선했다는 의상대(義湘臺) 등이 있다. 도량 전체가 사적 제495호 양양 낙산사 일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2005년 강풍을 타고 번진 산불로 낙산사는 큰 화재 피해를 입었다. 문화재청은 2007년까지 원통보전, 범종루, 심검당, 취숙헌, 선열당, 홍예문누각, 홍련암연화당, 해우소 등을 신축하였고 2009년에는 설선당, 근행당, 응향각, 정취전, 취숙헌, 고향실, 빈일루, 대성문 등을 신축하였다. 2015년 기준 화재로 손실된 사찰의 모습은 복원되었고, 주변 숲은 회복 중에 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주차장에서 낙산사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한컷했어요

입구에 설치된 종합안내도 입니다.
정문을 지나면 템플스테이(취숙헌)가 있고 이곳을 지나면서 보이는 절 모습
2005년 화재 당시의 사진과 복구 이력 안내판
관음지와 뒤로는 보타락 지장전이 보인다.
홍련암으로 가는길 우측으로 해변 가파른 절벽위에 위치한 의상대
홍련암이 보인다.

홍련암 유래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 소속인 낙산사의 부속암자이다. 낙산사 의상대(義湘臺) 북쪽 300m 지점에 있다. 672년(문무왕 12) 의상(義湘)이 관음보살의 진신(眞身)을 친견하고 대나무가 솟은 곳에 지은 불전(佛殿)이라 한다. 또, 일설에는 의상이 이곳을 참배할 때 푸른 새를 만났는데 새가 석굴 속으로 자취를 감추자 이상히 여겨 굴 앞에서 밤낮으로 7일 동안 기도를 하였다. 7일 후 바다 위에 홍련(紅蓮)이 솟아 그 가운데 관음보살이 현신하였으므로 이 암자 이름을 홍련암이라 하였다고 전한다. 바닷가 암석굴 위에 자리 잡은 이 암자의 법당 마루 밑을 통하여 출렁이는 바닷물을 볼 수 있도록 지어졌다. 의상에게 여의주(如意珠)를 바친 용이 불법을 들을 수 있도록 배려하여 이와 같이 지었다고 한다. 이와 같은 구조를 가졌던 감은사지(感恩寺址)의 법당은 죽어서 용이 된 문무왕이 출입할 수 있도록 역시 법당 밑에 바닷물이 통하도록 하였다. 신라 및 고려시대의 중창의 역사는 전해지지 않고 있으며 임진왜란 이후인 1752년(영조 28) 덕린(德麟)이 중수하였고, 1797년(정조 21) 혜근(慧勤)이 중수하였으며, 1802년(순조 2) 청호(晴湖) · 흥운(興雲)이 중수하였다. 1975년 원철(園哲)이 중창하여 옛 모습을 복원하였다.

홍련암은 1984년 강원도 문화재자료(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되었으며 당우로는 관음전과 요사채가 있다. 사리탑은 1971년 강원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근처의 해안에는 보기 드문 석간수가 있는데, 이 샘은 원효(元曉)가 양양의 영혈사(靈穴寺) 샘물을 석장(錫杖)에 담아 끌어왔다는 설화가 전한다.(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홍련암 내부모습. 방문당시에는 100일 기도중이었다.
보타전
소원이 이루어 지는 길을 지나 해수관음상 앞에서

해수관음상은 1990년대 중반에 세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이 관음상은 해수욕장과 가까운 위치에 자리 잡고 있으며, 스님들의 지도로 만들어졌습니다. 건립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기금을 모으고 각종 물품을 제공하며 매우 유기적인 방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관음상은 불교 신앙의 핵심인 관세音보살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관세음보살은 중생의 고통을 듣고 구원하는 역할을 담당하며, 이러한 역할이 상징적으로 나타나는 작품입니다. 이 상은 한국 불교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많은 불자들에게 신앙의 상징으로 여겨집니다.

또한, 낙산사의 건립과정에서 지역 주민들도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관음상의 프로젝트에 참여하여 재정적, 물질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로 인해 낙산사는 지역 사회와의 유대를 강화하는 데 도움을 주기도 했습니다.

해수관음상은 높이가 약 14.7미터에 달하며, 부드러운 곡선과 세밀한 조각이 특징입니다. 관음상의 조형미는 바다와 하늘을 배경으로 조화롭게 어우러지며, 관음상의 미소는 보는 이들에게 따뜻한 위로를 제공합니다. 조각의 끝부분에서 바람에 스치는 듯한 느낌은 신성한 공간을 한층 더 부각시킵니다.

관음상의 얼굴은 부드럽고 자애로운 표정으로 불자들에게 위안을 주며, 손의 자세는 기도를 상징합니다. 오른손은 고통받는 이들을 구원하겠다는 다짐을 나타내고, 왼손은 중생을 그리스어로 표현한 ‘정화’의 의도를 상징합니다. 바닷가에 세워진 이 상은 특히 해변의 일몰과 어우러지는 모습이 아주 아름다워 많은 사진작가와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해수관음상의 주변 환경 또한 특별한 매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파도 소리와 바람이 불어오는 곳은 영적인 힘을 느끼게 하며, 방문자들에게 차분한 마음을 제공합니다. 이러한 요소들은 낙산사를 찾는 이들에게 잊지 못할 경험을 선사합니다.

관음보살은 불교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존재로, 남녀를 불문하고 모든 중생들에게 자비를 베풀며 그들의 고통을 함께 나누는 상징입니다. 관음보살은 고통받는 이들을 지키고, 그들의 소망을 듣는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때문에 많은 불자들은 관음상을 통해 위안을 받고 도움을 청하며, 이러한 믿음은 수 많은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해수관음상은 관음보살의 의미를 더욱 부각해주는 구조물입니다. 많은 이들이 이곳에서 자신들의 소원을 비는 이유는 관음보살이 언제든지 그들의 소리를 들어줄 것이라는 믿음 때문입니다. 주변의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어우러진 관음상은 신자들에게 더 큰 영감을 주며, 그들의 경건한 마음을 더욱 깊게 만들어 줍니다.

관음보살에 대한 믿음은 특히 한국 불교에서 깊은 역사적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낙산사 해수관음상은 이러한 신앙을 현대적인 조각으로 표현한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불자뿐만 아니라 일반 관람객들도 이 상과 그 의미에 대해 깊이 있는 성찰을 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합니다. (출처: 티스토리 https://freetouring.tistory.com/457 )

해수관음상 전면에 새겨진 글귀 하나